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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아몬드의 공책
ㅡ 이은규, 별이름 작명소 고단한 잠은 멀리 있고나를 찾지 못한 잠은누구의 호흡으로 도착해 하룻밤을 보내고 있을까 나는 아직아름다운 운율에 대한 정의를잠든 그의 숨소리라고 기록한다 두 눈을 꼭 감으면 잠이 올 거야, 없는 그가 다독이며 말했다 잠이 오지 않았다두 눈을 꼭 감으면 감을수록떠도는 별들이동공의 어두운 웅덩이를 찾아와 유성우로 내렸다 밤새 유성우로 내리는 별들에게 새 이름을 지어주면차가운 호흡과별들이 돌아가는 시간이 꼭 알맞았다 오랫동안 성황을 이룰, 별이름 작명소 잠을 설친 새벽이 눈뜰 때마다 검은 액자 속 한 사람과 마주쳤다날마다 희미해지는 연습을 하는지명도를 잃어가는 사진 한 장 별이 태어나는 차가운 먼지 구름 속아무도 그가 먼지구름에 도착했다는 안부를 전해주지 않았다어떤 별의 소멸은 아직..
ㅡ 문정희, 비망록 남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남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사람이되고 말았다 가난한 식사 앞에서기도를 하고밤이면 고요히일기를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구겨진 속옷을 내보이듯매양 허물만 내보이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사랑하는 사람아너는 내 가슴에 아직도눈에 익은 별처럼 박혀있고 나는 박힌 별이 돌처럼 아파서 이렇게 한 생애를 허둥거린다
ㅡ 박준, 여름에 부르는 이름 방에서 독재했다 기침은 내가 억울해 하고 불안해 하는 방식이었다 나에게 뜨거운 물을 많이 마시라고 말해준 사람은 모두 보고 싶은 사람이 되었다 팔리지 않는 광어를 아예 관상용으로 키우던 술집이 있었다 그 집 광어 이름하고 내 이름이 같았다 대단한 사실은 아니지만 나는 나와 같은 이름의 사람은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다 벽면에서 난류를 찾아내는 동안 주름이 늘었다 여름에도 이름을 부르고 여름에도 연애를 해야 한다 여름에도 별안간 어깨를 만져봐야 하고 여름에도 라면을 끓여야 하고 여름에도 두통을 앓아야 하고 여름에도 잠을 자야 한다 잠, 잠을 끌어당긴다 선풍기 날개가 돈다 약풍과 수면장애 강풍과 악몽 사이에서 오래된 잠버릇이 당신의 궁금한 이름을 엎지른다
ㅡ 황인숙, 일요일의 노래 북풍이 빈약한 벽을휘휘 감아준다먼지와 차가운 습기의 휘장이유리창을 가린다개들이 보초처럼 짖는다 어둠이푹신하게깔린다 알아?네가 있어서세상에 태어난 게 덜 외롭다
ㅡ 허연, 얼음의 온도 누구나 마음속에 품고있는 사람은 한명씩 있다너무 쉽게 잊기엔 아쉽고다시 다가가기엔 멀어져 있는 그런 사람 얼음을 나르는 사람들은 얼음의 온도를 잘 잊고대장장이는 불의 온도를 잘 잊는다너에게 빠지는 일, 천년을 거듭해도 온도를 잊는 일, 그런 일
ㅡ 이훤, 점령 미소 하나로 너는 내 맘을 군림했다매번달가운 점령이었다 일생을 패하기로 한다
ㅡ 진은영, 천칭자리 위에서 스무 살이 된 예은*에게 슬픔은 가장 사랑스런 보석일거요,모든 사람이 그리 아름답게 슬픔을 착용한다면.— 세익스피어, 『리어왕』 너와 만났더라면가을 하늘에 대해 이야기 나누었을 거야서정주나 세익스피어, 딜런 토마스너와 같은 별자리에서 태어난 시인들에 대해종이배처럼 흘러가버린 봄날의 수학여행과친구들의 달라진 옷맵시에 대해 나뭇잎이 초록에서 주황으로 빠르게 변하는 그늘 아래우리가 함께 있었더라면너는 가수가 되는 꿈에서 시인이 되는 꿈으로도에서 라로, 혹은 시에서 미로건너뛰었을지도 모르지노래에서 노래로, 삶에서 삶으로 그것들은 서로 가까이 있으니까누군가의 손으로 흩어졌다그 손에 붙들려 한곳에 모여드는 카드 패들처럼 그러면 흰머리가 많이 늘어난 아빠는네가 2학년 3반이었는지, 4반이..
ㅡ 이은규, 아직 별들의 몸에선 운율이 내리고 엄마는 왜 가르쳤을까자신에게 진실하면 너는 늘 옳다 불가능의 시대에 혁명을 부르짖는 것혹은 별을 노래하는 것만큼, 허영을 채워주는 일도 드물다는 당신의 편지를 노려보았다밤새 가는 실핏줄 터지는 소리 한 혁명가의 꿈을 꾸는 밤다리를 저는 그녀와 보폭을 맞추기가 어려웠는데기다리기만 하는 자에게 올바른 순간이란 없다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더 잘 실패한 후에 맞게 될 적기 시가 존재하지 않는다면나는 혁명을 과거사라고 믿는 당신에 불과할 것이다아직 별들의 몸에선 운율이 내리고당신과 나의 정체는 우리 자신을 앞지르며 밝혀질 것 얼음이 떠다니는 운하 속으로한 시대가 던져지기 직전, 오고갔다는 문답 정체를 밝혀라그건 알아서 결정하시죠수배자 사진을 보니 틀림없군당신이 그렇게 말..
ㅡ 기형도, 질투는 나의 힘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ㅡ 문정희, 목숨의 노래 너 처음 만났을 때사랑한다 이 말은 너무 작았다같이 살자이 말은 너무 흔했다 그래서 너를 두곤 목숨을 내걸었다 목숨의 처음과 끝천국에서 지옥까지 가고 싶었다 맨발로 너와 함께 타오르고 싶었다 죽고 싶었다
ㅡ 박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이상한 뜻이 없는 나의 생계는 간결할 수 있다 오늘 저녁부터 바람이 차가워진다거나 내일은 비가 올 거라 말해주는 사람들을 새로 사귀어야 했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이의 자서전을 쓰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익숙한 문장들이 손목을 잡고 내 일기로 데려가는 것은 어쩌지 못했다 '찬비는 자란 물이끼를 더 자라게 하고 얻어 입은 외투의 색을 흰 속옷에 묻히기도 했다'라고 그 사람의 자서전에 쓰고 나서 '아픈 내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는 문장을 내 일기장에 이어 적었다 우리는 그러지 못했지만 모든 글의 만남은 언제나 아름다워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ㅡ 허연, 나는 빛을 피해 걸어간다 그대는 오지 않았네 삐뚤어진 세계관을 나누어 가질그대는 오지 않았네 나는 빛을 피해서 한없이 걸어가네 나는 들끓고 있었다모두 다 내주고 어느 것도 새 것이 아닌 눈동자만 남은 너를 기다렸다밤이 되면서 퍼붓는 어둠 속에 너는 늘 구원처럼 다가왔다철시를 서두르는 상점들을 지나 나는 불빛을 피해 걸어간다행여 내 불행의 냄새가 붉은 입술의 너를 무너지게 했는지무덤에도 오지 않을 거라고,보도블록 위에 토악질을 해대던 너를 잊을 수는 있는 것인지나는 쉬지 않고 빛을 피해 걸어간다도대체 얼마나 많은 당신들이 저놈의 담벼락에다 대고 울다 갔는지이 도시에서 나와 더불어 일자리와 자취방을 바꾸어가며이웃해 사는 당신들은 왜 그렇게 다들 엉망인지가면 마지막인지왜 아무도 사는 걸 가르쳐주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