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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 뜨거운 시선과 마주보다

김아몬드 2018. 1. 12. 03:13


* 이 리뷰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뜨거움' 다루기

역사 소재 영화, 특히 일제강점기나 민주화 운동 시기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에 대해서 흔히들 '필연적으로 뜨거워질 수밖에 없는 영화'라고 한다.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이끌어낼 수 있는 좋은 소재인 것은 맞지만 소재만으로는 영화를 만들 수 없고, 그렇기에 이런 류의 소재는 양날의 검이기도 하다. 어떤 영화들은 소위 '국뽕'이라고 불리는 애국심 마케팅 논란에 시달리기도 하고, 어떤 영화들은 함량 미달의 완성도로 인해 소재에 대한 모욕이라는 비판을 듣기도 한다. 결국 <1987>과 같은 영화들의 주요 관건은 이러한 '뜨거움'을 어떻게 다루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지나치게 소재에 매몰되어 충분한 개연성을 확보하지 못한 이야기를 '감독만 먼저 뜨거워진 채로' 전달하거나, 단순히 뜨거움이라는 감정을 이끌어내기 위한 작위적인 장면들이 소재에 대한 영화적 접근의 전부인 경우의 영화들은 결코 '뜨거움'을 잘 다뤄낸 영화라고 볼 수 없다.


작년 여름에 개봉했던 <택시운전사>는 그런 의미에서 굉장히 흥미로운 영화였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라는 뜨거워질 수밖에 없는 역사적 사건과 관련된 실화를 과하다 싶을 만큼 강박적으로 적정 온도를 찾아내려는 노력의 흔적이 보이는 영화였기 때문이다. 이런 절제된 톤 앤 매너는 오히려 송강호라는 배우가 가진 드라마틱한 이미지와 맞물려 그가 서울의 외부인에서 광주의 당사자로 변해가는 과정의 이야기가 자연스러운 뜨거움과 개연성을 가질 수 있게 한 좋은 선택이었다. 장훈 감독은 전작인 <고지전>에서도 외부인이 사건의 당사자로 개입해가는 이야기를 비교적 담담한 톤으로 그려낸 바 있지만, <1987>의 장준환 감독의 전작들이 가지고 있던 톤 앤 매너는 그것과 거리가 멀었다. 그렇기에 <1987>이 1987년 대한민국의 뜨거움을 다뤄내는 방식은 인상적이었다.




수많은 계란들

영화의 시작을 떠올려보자. 검은 화면에 째깍째깍하는 시계바늘 소리가 들리다가 "땡! (대통령 동향) 전두환 대통령은~"이라는 땡전뉴스가 나온다. 뉴스에는 김윤석이 맡은 영화의 주 악역 박처원 처장이 전두환 대통령에게 훈장을 받는 장면이 나오는데, 박처원 처장(과 직접 등장하지는 않지만 진짜 악역인 전두환 대통령)은 <1987>의 수많은 인물들 중 유일하게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등장하는 인물이다. 반면 하정우가 맡은 최환 검사는 초반부를 이끄는 중요한 인물이지만 검사직에서 내려온 영화의 중반부 이후에는 마치 드라마의 중도 하차에 가까울 정도로 존재감이 줄어드는데, 처음에는 이 지점이 영화의 아쉬운 부분 중 하나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이는 존재감이 분명한 큰 악역과 이에 저항하는 여러 명의 등장인물들의 대비를 통해 1987년 대한민국의 주역은, 그리고 영화 <1987>의 주인공은 어느 한 개인이 아니라는 뜻임을 알 수 있다. 

최환 검사에게 바통을 넘겨 받은 윤영삼 기자(이희준 분)를 비롯한 수많은 기자들을 통해 박종철 열사가 물고문을 받던 중 질식사했다는 진상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고, 그 다음에야 한병용 교도관(유해진 분)과 연희(김태리 분)가 등장한다.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도 박종철 열사의 사망 소식을 제일 먼저 보도한 중앙일보의 신성호 기자와 편집국장(오달수 분), 윤영삼에게 사실을 털어놓은 오연상 교수, 치안본부장(우현 분)의 회유에 넘어가지 않고 부검 소견의 조작.은폐를 막은 국과수 황적준 과장, 설경구가 연기한 김정남과 그를 숨겨준 스님들 그리고 신부님들 등 수많은 '작은 개인들의 작지 않은 행위'가 하나하나 모여 커다란 스노우볼을 굴리기 시작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영화의 주인공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데에 비해 <1987>의 화려한 출연진들은 많은 분량을 가진 한명의 주인공으로서 돋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 많은 '작은 개인'들 중 한명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대통령과 박처원 처장이라는 악역의 모습으로 시작한 영화는 이와는 정반대로 시청 광장을 가득 메운 수많은 주역들, 1987년 대한민국의 시민들의 모습으로 끝을 맺는다. 영화는 이렇듯이 특정한 주인공에 감정을 이입해하도록 만들어 뜨거움을 끌어내지는 않지만, 관객으로 하여금 그 수많은 주역들 중의 한 명이 되어 직접 뜨거워지기를 유도한다. 스크린 안의 뜨거움을 관객석으로 끄집어내는 것이 아닌, 관객이 스크린 안으로 들어가 뜨거워지도록 한 것이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라지만, 바위는 아무리 강해도 죽은 것이고 계란은 아무리 약해도 산것이다. 계란은 깨어나서 결국 바위를 뛰어넘는다." 2013년에 개봉하여 천만관객을 기록한 <변호인>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비록 <변호인>은 '송우석 변호사(송강호 분)'라는 큰 주인공의 뜨거움을 다룬 영화라는 점에서 <1987>과 대비되는 작품이지만, 두 작품 모두 셀 수도 없이 많은 계란들이 깨진 이야기이자 결국엔 깨어난 계란이 바위를 뛰어넘은 이야기라는 공통점도 지니고 있다.



신발의 메타포

영화 전반부 줄거리를 최환 검사와 기자들이 이끌어간다면, 후반부는 한병용과 연희, 그리고 이한열 열사(강동원 분)의 스토리가 메인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중에서도 운동권 학생인 이한열 열사와 정반대의 잡지와 음악에 더 관심이 많은 "첫 미팅인데 데모하고 지랄이야,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냐는 연희를 이어주는 매개체가 바로 신발이다. 

시위 도중 백골단에게 잡혀갈 뻔한 연희를 구해준 이한열이 '신발 한쪽'을 잃어버린 것과 대칭되는 장면이 삼촌이 남영동에 끌려갔다는 사실을 안 연희가 남영동 대공분실 앞에서 전경들과 대치하다가 백골단에게 잡혀가 시골에 버려졌을 때 '신발 한쪽'을 잃어버린 부분이다. 이한열이 신발 한쪽을 잃어버렸을 때 연희가 타이거 신발을 사준 것처럼, 연희가 신발을 한쪽을 잃고 교외 시골에 버려진 채 도움을 청했을 때 이한열이 들고 온 것도 타이거 신발 한 켤레였다. 또 연희가 사준 타이거 신발을 신고 이한열은 다시 시위를 하러 돌아가고, 이한열이 가져다 준 타이거 신발을 신은 연희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 삼촌에게 부탁받은 잡지를 전해주기 위해 향림교회로 향한다. 이렇듯 두 인물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매개체가 바로 이 타이거 신발인 것이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시위 도중 이한열의 타이거 '신발 한쪽'이 벗겨지게 되고 직사된 최루탄에 맞아 쓰러지면서 끝내 신발을 다시 신지 못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전 두번의 '신발 한쪽'은 서로가 전해준 타이거 신발이 아니지만 마지막으로 벗겨진 신발 한쪽은 타이거 신발이라는 것이다. 연희가 사준 이한열의 타이거 신발 한쪽이 벗겨지고, 그 위로 피가 뚝뚝 떨어진다. 이한열이 이전과는 다르게 다시는 신발 한켤레를 신을 수 없을 것이라는, 다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뜻이다. 이는 이한열에게 또다시 신발을 사줄 수는 없는 연희의 각성으로, 박종철에 이어 이한열까지 사망으로 내몬 독재정권에 대한 시민들의 각성으로 이어진다. 연희가 집에서 달려나와 거리로 나온 많은 사람들을 목격하고, 시위대의 버스 위에 올라가 시청 광장에 운집한 시민들과 함께 시위 구호를 외치는 엔딩신은 결국에는 이 세번의 '신발 벗겨짐'으로 인해 연희가 점차 1987년 대한민국의 시국의 당사자가 되면서 변화하게 된 결과인 것이다.

참고로 이한열 열사가 쓰러질 때 신고 있었던 신발이 실제로 타이거 신발이라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앞선 두번의 '신발 한쪽이 벗겨짐'은 감독이 각색하면서 의도적으로 넣은 장치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1987>에서 또 한가지 인상깊었던 상징은 김정남이 향림교회에서 박처원에게서 도망을 치던 도중 전깃줄을 잡고 간신히 매달려있는 그림자를 박처원이 보게 되는데, 하필이면 그 그림자가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있는 모습이 그려진 스테인드글라스에 비춰진 것이라는 점이다. 박처원 처장이 끝내 몰락하기 직전에 본 형상이 예수라는 점과 더불어 그림자를 만들어내고 스테인드글라스를 빛나게 하는 햇빛이 교회의 십자가 윗부분과 맞닿는 듯한 장면이 묘사되기 때문에 무교인 나조차 이 장면이 상당한 상징성을 지닌다고 단번에 느낄 수 있었고, 정확히 어떠한 의미인지는 파악하지 못했지만 일종의 정의구현, 박처원에 대한 응징이 이루어진다는 뜻이라고 생각했다.

그 외에도 김정남이 처음에 숨어있던 장소가 절이었다가 교회로 바뀌고, 여기서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을 담은 서신이 전해져 성당에서 세상에 알려진다는 것은 역시 1987년의 일은 특정 종교와 상관 없이 모든 국민들이 함께 이루어낸 일이라는 영화 전체의 메시지를 일관되게 상징하는 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화면과 연출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의문 중 하나가 유독 인물들의 얼굴만 화면에 차도록 극단적으로 클로즈업한 장면이 많다는 것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이것이 작은 개개인의 행동이 모이고 모여서 큰 변화를 만들었다는 영화의 전반적인 메시지에 따르면서도 이 개인들 한명 한명의 중요성을 조명하는 것도 잊지 않고 있음을 드러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러닝타임 내내 개인들의 중요성을 조명하고 이들의 작은 행동들을 맞춰나가다가 도달한 엔딩신에서는 와이드 앵글로 광장 전체에 모인 시민들의 함성과 모습을 담아내는 연출은 계속 언급해왔던 이 영화의 큰 주제를 극명히 보여주는 훌륭한 구성이고 영화가 여러 인물들의 서사를 다루고 있음에도 처음부터 끝까지 짜임새있게 이를 담아내는 데에 성공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장면을 꼽자면 박처원이 계속 고문을 견디는 한병용에게 자신의 가족사를 들려주며 협박을 하는 신이다. 이 신은 남영동 대공분실 바로 옆에 있는 것으로 묘사된 남영역에 기차가 지나가는 소리와 박처원에 얼굴에 비춰진 고문실의 작은 창문 그림자, 그리고 그의 가족들이 몰살당하던 때의 비명이 겹쳐져 마치 어두운 밤에 천둥번개가 치는 듯한 느낌을 주면서 박처원이 왜 북한사투리로 "내래 빨갱이 잡는거 방해하는 간나들도 모조리 빨갱이로 간주하갔어"라는 대사를 치는 인물인지 관객에게 이해시켜줌과 동시에 그의 악랄함을 피부에 와닿게 하는 무시무시한 연출이 이루어진 장면이다. 이 신에서의 김윤석의 연기는 박종철의 아버지가 박종철 열사의 뼛가루가 날아가지 않고 얼은 강 위에 쌓여있는 것을 보고 "와 가지를 못하고 있니. 종철아 잘 가그래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데이."라고 울부짖으며 뼛가루를 강물에 흘려보내는 장면에서의 연기와 더불어 <1987>의 모든 장면의 연기들 중 가장 놀라웠던 연기였다.


이런 인상적인 신들과 더불어 영화의 전체적인 연출도 충분히 좋다고 생각이 든 편으로, 장면을 최대한 세밀하고 사실적으로 담아내고자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다큐멘터리의 화면처럼 핸드헬드 기법이 적용된 신이 여럿 눈에 띄고, 박처원이 자신의 처벌에 대한 보고서를 집어 들고 진짜 권력, 진짜 악역인 전두환 대통령의 사진을 노려보는 신을 포함하여 전두환 대통령이 결국에는 진짜 악역임을 꾸준히 상기시켜 주는 점도 사건의 본질에 충실히 다가가는 영화의 본분을 잊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만 굳이 아쉬운 점을 찾아보자면 이한열이 연희의 집에 찾아와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의 경우 영화의 일관적인 톤에서 어긋나는 멜로드라마나 순정만화의 톤을 취하고 있어 조금 뜬금없다는 느낌을 받았다. 또한 연희의 친구는 지나치게 소모적인 캐릭터로 보여 그녀가 등장할 때가 대사와 컷이 불필요하게 낭비된다는 생각이 유일하게 든 순간이었다.



'뜨거움'을 재현하다

이렇듯 <1987>은 1987년의 '뜨거움'을 2017년의 관객들에게도 재현해내는 데에 성공해냈다. 박종철의 아버지가 울부짖을 때 관객들도 같이 울고, 박종철이 사망하고 이한열이 쓰러지는 순간에 관객들은 얼굴을 감싸쥔다. 박처원과 그의 부하들의 악랄함에는 혀를 차기도 한다. 그렇게 관객들도 끝끝내 1987년 시청 광장에서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는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가 된다. 이는 우리도 지난 겨울에 광장에서 뜨거워졌던 기억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1987>은 1987년의 대한민국의 뜨거움을 2017년의 대한민국의 뜨거움과 성공적으로 이어낸 영화다. 오롯하게 1987년의 일들을 담아내던 시선은,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1987년의 뜨거움을 담아 당신을 바라본다. 


2017년의, 이젠 2018년의 대한민국을 그 뜨거운 시선으로 살아가야 할 차례다.


"뜨거움을 재현해내는 오롯한 시선 (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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