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아몬드의 공책
뜻밖의 여정: 군산 본문
여정1 (旅程) : 여행 중에 거쳐가는 길이나 여행의 과정
여정2 (旅情) : 여행할 때 느끼게 되는 외로움이나 시름 따위의 감정
다들 갑자기 그냥 왠지 어딘가로 떠나고 싶은 날이 있지 않은가. 나도 그랬다. 버스든 기차든 일단 타고 아무 생각없이 떠나고 싶었다. 친구에게 아무데나 갈만한 곳을 추천해달라고 했다. 군산. 군산이라... 들어본 적은 있지만 한번도 그곳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지는 않았다. 그래서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창밖을 보니 이미 비가 내리고 있었다. 카메라를 가져가기는 글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용히 잠을 청했다.
아무래도 생각보다 비가 더 많이 오는 듯 했다. 원래 예상치 못한 변수덕분에 여행이 낭만적이 되는 거라 애써 생각하며 터미널로 향했다. 지금 이 여행 자체가 예상치 못한 변수와 같은데 비따위가 대수인가. 터미널 대광장에 앉아서 먹는 커피와 샌드위치. 이정도면 벌써부터 여행 분위기를 내기에 충분하다. 화장실에 들렀다가 갈까. 아니다, 버스가 곧 출발할 것 같다. 얼른 버스에 타자.
의외로 버스는 가득 찼다. 내 옆자리에는 양복을 입은 중년 남성이 앉아있었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눈을 감았다. 엄마가 말씀하시길 난 어려서부터 차만 타면 잠을 잤다고 한다. 잠못들고 울어대는 나를 재우기 위해 카시트에 앉혀서 동네를 한바퀴 돌고 들어오곤 했다는 얘기를 내가 차에서 자다가 깰때마다 하시곤 했다. 사실 차에만 타면 잠을 자는 게 멀미의 일종이라는 얘기를 어디서 본 것 같다. 아무렴 어떠랴, 긴 시간을 버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자는 거니까.
비구름은 수도권에만 모여있는 것 같았다. 충청도쯤 되어서 멈춰선 휴게소의 하늘은 잔뜩 흐리긴 했지만 빗방울은 거의 떨어지지 않았다. 아마도 서서히 아래로 내려올 듯 싶었다. 휴게소에서 커피나 한 잔 새로 사 마시려고 했는데 카페에서 나보다 네다섯살 정도 많아보이는 젊은 남녀의 무리가 커피 스무잔 정도를 세번에 걸쳐 주문하고 있었다. 잘 됐다. 그냥 잠이나 더 자지 뭐.
눈을 뜨니 군산 시내였다. 생각보다 더 괜찮은 동네 같았다. 저녁을 먹어야 하는데 뭘 먹어야 할지 결정하기 힘들었다. 혼자 여행을 오면 다 좋은데 메뉴 선택의 폭이 굉장히 좁아진다는 단점이 있었다. 밥을 먹고 싶은데. 뭐, 삼각김밥도 밥이지. 군산 터미널에 도착했을 때 이미 저녁 다섯시가 지난 시간이라 다른 관광지를 갈 생각은 애초에 하지도 않았다. 애초에 그런 곳을 둘러보는 게 목적도 아니었고. 대충 밥을 때우고 카페에 들어가 앉았다. 짐을 챙길때 가방에 가장 먼저 넣은 박준 시인의 시집과 산문집을 꺼내 테이블에 올려놨다. 문장들을 한참 쓰다듬고 문득 쓸쓸해졌다. 원래 그런건가. 나는 원래 그랬다.
술을 먹고 싶어졌다. 혼자서 시끄러운 술집에 들어갈 수는 없으니 작은 맥주가게에 들어갔다. 감자튀김과 맥주는 지나칠 수 없는 조합이지. 생맥주 두잔을 마시는 동안 주변 손님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어떤 이들은 월드컵 얘기를 했고, 어떤 이는 자신의 사업 얘기를 했으며 또 다른 이들은 서로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같은 시간과 같은 공간에 있지만 서로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 그리고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는 한 사람, 나. 당신과 나도 같은 시간과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밥도 먹었고, 술도 마셨는데, 잠은 어디서 자야할지가 문제였다. 나는 낯선 곳에서는 잠을 설치곤 했다. 소위 ‘낯을 잘 가린다’는 말은 사람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물론 장소건 사람이건 한번 익숙해지면 마치 집마냥, 가족마냥 편하게 지낼 수 있지만 대부분은 채 익숙해지기도 전에, 아니면 이제 갓 익숙해졌다는 생각이 들때 즈음 떠나야했다. 어쩌면 본능적으로 익숙해지기를 거부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작 하룻밤, 그것도 대부분은 잠들지 못한 채 보내야 할 시간을 위해 어딘가에 묵어야할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아마도 이곳에도 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이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별다른 생각 없이 근처의 코인노래방에 들어갔다. 비가 오니 가사에 비가 들어가는 노래들이 자꾸 머릿속에서 저절로 떠올랐다. 그들을 다 불러주지도 못한 채 삼천원어치 도피의 시간도 끝이 났다. 비는 갈수록 거세졌다. 피시방에 가는 것이 최선의 선택으로 보였다. 피시방은 오늘날 시간을 보내기에 가장 효율적인 곳이다. 시간당 천원에 긴 시간을 한꺼번에 결제하면 그보다 싼 값에 편안한 의자에 기대서 얼마든지 잠을 잘 수도 있다. 자리에 앉아 친구가 좋아하는 가수의 새로 나온 노래를 틀어놓고 삼십분 가량 멍하니 앉아있었다. 창가에 다가가니 열려있는 창문으로 빗줄기가 들이치고 있었다. 흑백의 필터가 어울리는 풍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울리지도 않는 박준의 구절이 스쳐갔다.
새로운 시대란 오래된 달력을 넘길 때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당신을 보는 혹은 당신이 나를 바라보는
서로의 눈동자에서 태어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ㅡ 박준,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중에서 <해>
어쩌다 내가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 생각해봤다. 새로운 일을 해보려고가 아니라, 그저 새로운 장소에 오고자였을까. 그래서 점심과 저녁 사이의 거리만큼 떨어져있는 이곳까지 와서 카페에서 시를 읽고,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고, 피시방에 오는, 서울에서라면 더 편하고 쾌적하게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일까. 일상의 배경을 바꾸기만 해도 똑같은 일이 마치 다른 일인것처럼 낯설게 느껴지는 법이다. 비가 쏟아지는 밤거리를 바라보고 있는 나조차도 낯설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리는 걸 보아하니 아침까지도 그치지 않을 비인듯 했다. 밤은 길다. 밤은 짧다. 보내기 나름이지만 밤은 언제나 낯설기 마련이다.
글을 쓰는 일은 생각보다 더 아픈 일이라고 생각한다. 무표정한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자판을 두드리기도 하지만 때로는 거의 울다시피하며 공책에 글자들을 쏟아내기도 한다. 적어도 나에게 글을 쓰는 일이란 내 영혼의 조각을 편린일지라도 떼어다가 녹여내는 어려운 일이었다. 내 영혼이 감당하지 못하는 글을 쓸 수가 없는 법이다. 마음에도 없는 글은 더더욱 쓸 수 없었다. 그래서 글은 어떻게든 내가 나를 앓는 방식이었다. 어떤 글은 재채기 한번처럼 잠깐 간지럽다가 툭하고 쏟아졌지만 어떤 글은 열병처럼 내내 뜨겁게 끓다가 서서히 나아졌다. 시집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책을 독립출판 형태로 세상에 내놓고나자 그런 생각은 더욱 강해졌다. 무슨 깡으로 이런 걸 내놨는지, 한없이 부끄러웠다. 책임감을 가지고 글을 쓴다는 말은 웃긴 말이다. 차라리 내가 쓴 글에 책임을 지라는 말이 맞는 말이겠다. 여기까지 왔으니 이제 나도 책임을 져야했다.
나도 당신처럼 한번 아름다워 보자고 시작한 일이 이렇게나 멀리 흘렀다. 내가 살아 있어서 만날 수 없는 당신이 저 세상에 살고 있다. 물론 이 세상에도 두엇쯤 당신이 있다. 만나면 몇 번이고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다.
ㅡ 박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중에서 <시인의 말>
잡념들이 흡연실의 담배 연기처럼 머릿속을 가득 채운 밤을 지나 해가 떴다. 거짓말처럼 비는 그쳤고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듯이 활짝 개어있었다. 전주에서 대학을 다니는 친구에게 연락을 했다. 그 친구는 차를 몰 줄 알았다. 친구의 차를 타고 군산에서 전주로 향했다. 운전을 하는 친구의 모습을 뒷좌석에서 지켜보고 있자니 낯선 사람처럼 느껴졌다. 전주는 군산보다 더한 관광지다. 한옥마을과 이름을 까먹은 유명한 성당은 이미 몇년전에 실망할대로 실망했었기에 이곳에서도 관광지라고 할만 한 곳은 가지 않기로 했다.
친구와 밥을 먹고, 바로 옆에 있는 조그만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시간을 보냈다. 역시 서울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들이었다. 하지만 충분히 낯설고 충분히 흥미로웠다. 아름다운 일을 하고자 하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입버릇처럼 말하듯이, 아니 글버릇처럼 쓰듯이 아름답지 않은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건 그 와중에도 아름다운 사람들을 생각하는 일 뿐이었다. 생각하는 일은 끝내 생각을 글로 옮기고 나서야 끝이 난다. 나의 여정도 이곳에서 이제서야 끝을 맺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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