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테이블>,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물과 언어
* 이 리뷰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내가 영화를 볼 때 주의 깊게 보는 요소들은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크게 인물, 이야기, 연출이다. 인물들에 대한 묘사가 선명하고 각 인물들 간의 관계가 지나치게 모호하거나 불분명하지는 않은가. (복잡함과 모호함은 다르기 때문에 이 둘을 구별하는 어려운 작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해냈는가!) 이러한 인물 특성을 바탕으로 한 행동과 대사가 개연성을 지녀 이야기로 전개되는가.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영역이든, 그렇지 않은 영역이든!) 마지막으로, 이 모든 과정이 오프닝부터 엔딩까지 일관적이고, 아름답게 (이 ‘아름답게’의 의미는 굉장히 다양함!) 카메라에 담겨지는가.
영화를 정말 전문적으로 본다거나 평가할 수 있는 그런 입장은 아니지만 나름대로의 취향에 맞게 감상하는 개인적인 기준이 정립된 후에는 최대한 이런 관점에 입각해서 영화를 보려고 노력을 하고 있다. 이 모든 요소들을 영화를 보는 그 순간에 캐치해낸다면 정말 좋겠지만 (아마 그런 사람들이 영화평론을 쓰는 게 아닐까) 안타깝게도 나는 그런 수준의 동체시력과 기억력을 지니지는 못했기에 극장을 나와서도 꽤 오랜 시간에 걸쳐 영화를 복기하면서 그에 대한 내 감상을 정리하곤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영화를 보는 도중에는 알아차리지 못했던 포인트들도 짚어낼 수 있는데, 이번에 유독 영화를 보고 난 후에 정말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된 영화가 있었다. <최악의 하루>로 유명한 김종관 감독의 새로운 작품 <더 테이블>이다.
영화는 오전 열한시, 오후 두시 반, 오후 다섯시, 저녁 아홉시의 네 시간대에 어느 조용한 카페를 찾은 손님의 이야기를 담은 에피소드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각 정유미, 정은채, 한예리, 임수정이 그 손님이자 관객으로 하여금 그들의 사연을 엿듣는 대상으로 자리한다. 이들은 모두 흔하지만은 않은 관계에서 비롯된 이야기를 이 작은 테이블을 사이에 둔 채로 풀어나간다.
이들은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거나, 자신의 사연을 하소연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상대방과 대화를 나누기만 할 뿐이다. 마치 시간이 자연스럽게 흐르듯이 이야기도 흘러간다. 지나치게 친절하고 불필요한 설명은 거의 없이 묘사된 날것에 가까운 인물들의 관계를 감독은 관객들에게 굳이 설득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냥 때로는 어색하고 때로는 불편하고 또 때로는 익숙치 않은 대화를 담담한 어조로 이어나가는 인물들과 그런 인물의 얼굴을 오랜 시간 클로즈업 한 채로, 마치 그의 이야기가 끝날 때 까지 기다려주는 듯이 카메라의 움직임을 최소화한 연출은 어쩌면 감독마저도 관객의 입장에서 이들의 이야기를 그저 듣고만 있는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이다. 하지만 결국 이런 방식의 연출은 이윽고 감독이 가장 중요시 하는 것은 ‘말’임을 알아차리게 해준다.
감독은 전작에서도 화면을 가득 채우는 공간과 언어의 마술을 빚어낸 바 있는데, 그때는 인물들이 대화를 하며 걸어다니는 것을 따라가는 듯한 느낌을 자아냈다. <최악의 하루>가 한 인물이 다른 사람들을 만나면서 생기는 일들, 그들과 나누는 대화를 그 과정에서 계속해서 바뀌는 공간과 ‘반죽’하여 만들어 낸 이야기라면 <더 테이블>은 반대로 조용하고 분위기 좋은 어떤 카페의 ‘그 테이블’이라는 하나의 같은 공간에 다른 인물들이 각각 다른 시간대인 오전 열한시, 오후 두시 반, 오후 다섯시, 저녁 아홉시의 시간에 상대방과 나누는 대화를 얹어놓은 듯한 이야기인 셈이다. 결국에는 전작과는 완전히 다른 성격의 이야기는 전작에서도 보여줬던 감독 특유의 시선과 대사를 기반으로 전개된다는 역설적인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굳이 오전 열한시 같은 ‘시각’이 아니더라도, 각 에피소드의 인물들이 겪어온 것으로 묘사되는 ‘시간’들은 그 인물을 설명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결국 이 영화의 인물들은 시간에 대응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인물들이 나누는 대화의 언어들은 한적한 동네의 어느 조용한 카페라는 공간의 특성과 조응하여 마치 부유물처럼 70분이라는 짧디 짧은 러닝타임동안 떠다니면서 이 작품 특유의 분위기를 형성한다. (에피소드들의 결말을 본다면 알겠지만) 결국엔 영화 마지막 장면의 떨어진 꽃잎들처럼 바람이 불고 비가 오면 금세 날아가버릴 정도로 잔잔한 언어들이지만 결코 그 밀도 자체는 마냥 가벼운 것은 아닌 것이다. 부유하거나, 침전하는 이 언어들이야말로 결국엔 공간과 시간, 사람이 빚어낸 산물인 것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화면이야말로 이 영화가 사랑스럽다고 느끼는 지점이 아닐까.
“시간에 대응하는 인물의 심도, 공간에 조응하는 언어의 밀도” (3.5/5)